글 작성 : 2025년 04월 13일
글 제목 : [해설자료] 1. 미국의 정치 개입 역사①
[해설자료] 미국의 내정간섭 저지하자
1. 미국의 정치 개입 역사①
- 국민주권당 자주독립위원회
미국은 자신의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 한국 정치에 끊임없이 개입해 왔다.
1) 미군정과 이승만 시기
1945년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다. 우리 민족은 우리 스스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인민위원회, 건국준비위원회 등을 만들어 나갔다. 그러나 1945년 9월 8일 미군이 한반도에 진입하면서 미군정을 실시했다. 더글라스 맥아더 총사령관은 포고령 1호를 발표해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를 점령한다”라고 밝혔다.
미군정은 1945년 10월 10일 ‘38도선 이남에는 미군정 외에 어떤 정부도 있을 수 없다’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미군정은 전국 각지에서 만들어지고 있던 인민위원회, 치안위원회 같은 자치 조직들을 부정하고 파괴하였다. 김구 등이 만든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부정하였다.
대신 미군정은 조선총독부의 기구와 체계, 관리들을 대부분 유임하면서 친일파를 대거 등용하였다. 이 조치는 친일파가 다시 대한민국을 장악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45년 12월 열린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미국과 소련은 한국에서 임시정부를 만든다는 것, 그리고 그 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하여 공동위원회를 설립하며, 최장 5년 동안 후견(신탁통치)한다고 합의하였다. 신탁통치를 제안한 것은 미국이었고 소련은 즉시 독립을 주장하였다. 그러다 협상 과정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되 최장 5년 동안 4개국이 후견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자신들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지만,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고 가짜뉴스를 퍼트려 한국 국민을 반탁 대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 지지로 분열, 대립시켰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이후 38도선 이남 즉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추진하였으며 그 결과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정부가 수립되었다. 친일 청산과 통일민주정부 수립이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힌 것은 미국의 내정간섭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한반도 분단과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 제주도민의 저항은 4.3항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승만을 앞세워 제주도민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미군정은 미 제6사단 로스웰 브라운 대령을 1948년 5월 중순께 제주도 최고지휘관으로 파견하였으며 미 극동사령부는 구축함 크레이그호를 제주도에 급파하여 진압 작전에 대비했다. 윌리엄 로버츠 주한 미국 군사 고문단장은 제주도민 학살을 지휘한 송요찬, 채병덕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공개서한으로 표명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미국이 초토화작전 등으로 제주도민을 학살한 한국군의 배후에 있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미국은 테러와 암살도 자행하였다. 김구 선생 암살범인 안두희는 미군 방첩대(CIC) 요원이자 미국의 정보원이었다. 여운형 선생 암살의 경우 미군정은 암살범의 신원을 파악하고서도 범인을 검거하지 않았다. 미국이 테러·암살을 조장하거나 깊이 개입했음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1960년 이승만이 3.15부정선거를 저지르고 국민이 4.19혁명에 나섰다. 미국은 4.19시위가 반미·통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해 매카나기 주한 미국 대사를 보내 이승만에게 ‘무조건 하야’할 것을 요구했다. 분노한 국민이 더 큰 사회 개혁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으려고 한 것이다.
2) 박정희 시기
1960년 4.19혁명 이후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미국은 5.16 쿠데타를 배후에서 실행한 장본인이다.
5.16 쿠데타 당시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이었던 앨런 덜레스는 1964년 5월 3일 영국 BBC방송에 출연해 “내가 재임 중에 CIA 해외활동으로서 가장 성공을 거둔 것은 5.16 쿠데타였다”, “만약 미국이 무언가를 하지 않았더라면 한국민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에 현혹되어 남북통일을 요구하는 폭도들을 지원하였을지도 모른다”라고 하였다.
애초에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가진 미국이 박정희의 쿠데타 병력 이동을 몰랐을 리 없다. 미국은 4.19혁명 이후 타오른 한국 민중의 민주주의와 통일의 열망을 막기 위해 군사쿠데타에 관여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를 암살한 김재규 역시 배후에 미국이 있었다.
김재규는 암살 직전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를 세 차례나 만났으며 암살 당일에도 만났다. 암살 며칠 전에는 로버트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도 만났다. 암살 하루 전날 존 베시 미 육군참모총장은 한 강연에서 “(한미 관계에서) 가령 ‘특별한 사건’이 일어난다고 해도...”라고 말하여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1979년 11월 5일 자 뉴욕타임스는 박정희 암살에 대해 보도하며 “죽인 것은 한국이지만 지시한 것은 미국이다”라고 하였다. 김재규 자신도 재판 과정에서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발언을 꾸준히 하였다.
3) 전두환 군사독재 시기
박정희 사후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신군부가 군사 반란을 일으켰다. 한국 군사작전 지휘권은 주한미군 사령관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12.12쿠데타 또한 미국의 승인 하에 진행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미국은 5.18광주학살의 배후다.
1980년 5월 22일 백악관 ‘한국 관련 정책검토위원회’ 회의록에 따르면 미국 정부의 주요 결정자들이 백악관 상황실에 모여 “최소한의 무력으로 광주 질서 회복”을 결정했다.
미국은 5월 25일 미 제7함대 항공모함 코럴시호를 부산에 입항시켰다. 전두환 정권이 광주시민을 진압하는 데 실패하고 항쟁이 확산할 경우 미국이 개입하려 한 것이다.
전두환이 정부 실권을 장악하고 난 이후인 1980년 8월 27일 존 위컴 주한미군 사령관은 AP통신과 인터뷰에서 “박정희 피살 이후 가장 성공적인 미국의 한국 정책 가운데 하나는 전두환 정권의 수립이다. 우리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고 그 보람도 크다”라고 말해 미국이 전두환을 지지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직선제를 이뤄냈으나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미국은 이 과정에도 개입하였다.
6월항쟁 당시 전두환은 계엄을 검토하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게스틴 시거 당시 아태지역 차관보를 한국에 파견했고 시거는 6월 24일 전두환과 노태우를 각각 만났다. 시거는 노태우에게 “권력 이양은 반드시 평화적이어야 하며 한국 정부는 보다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 결과 6월 29일, 노태우는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겠다고 공표했다.
시거는 “1987년에 대선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6.29선언 다음날 한국을 떠났다. 당시는 대선은 고사하고 개헌 일정도 논의되지 않았던 때였다.
이러한 자료들을 보면 6.29선언에 미국이 적극 개입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은 1987년 6월항쟁 당시 폭발하는 한국 국민의 민주화 요구가 반미감정으로 번져가는 것을 우려해 직선제를 수용하는 한편, 노태우가 군부독재를 이어가도록 해 한국 국민의 민주화 및 민주사회 건설의 요구를 가로막은 것이다.
미국은 1987년 대선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CIA는 대선 판세를 예민하게 관측하고 주시하였다. 한국 유권자를 상세하게 조사하여 대선에서 표심이 어떻게 흐를 것인지를 분석하였다.
CIA는 주한 미국 대사관이 보내온 보고를 인용하며 “노태우는 개혁적 태도를 가진 리더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노동과 사회 복지 이슈에 관심이 있고, 평양과의 대화처럼 다른 영역에서의 유연성도 보여주고 있다. 야당 후보인 김영삼과 김대중은 미군 철수나 대기업 해체 등 야당의 정강과 같은 더 극단적이고 논쟁적인 주제에 집중한다”라고 평가했다.
CIA는 12월 초 “여당이 대대적인 부정행위를 자제하는 것처럼 한국 국민에게 인식되기만 하면 근소한 차이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한국 국민이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한다”라며 “그럼에도 노태우 후보는 우세를 유지하면서 시위의 부활을 막자면 정치 개혁 공약에서 보다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라는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에드워드 더윈스키 미국 국무부 차관은 1987년 6월 22일 김현욱 국회 외무위원장을 만나 노태우에 대해 조언하였다.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전두환의 그늘에서 조속히 벗어나 독자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하고, 그러면서도 전두환과 적대관계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주문했다. 더윈스키는 여당에 정치적인 타협도 주문했다. 학생과 시민들의 민주화 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여당이 정치적 타협을 이끌게 되면 상황은 안정될 것으로 보고, 여당의 타협 행보에 대해 미국의 국무장관이나 국방장관 모두 찬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선 국면에서 미국은 한국 주요 인사를 숱하게 만났다. 7월과 8월에는 제임스 릴리 주한 미국 대사가 김대중 당시 통일민주당 고문과 세 차례 만났다. 10월에는 마이클 아마코스트 국무차관이 한국을 방문해 대통령 후보들을 면담했다. 미국은 대통령 후보들에게서 한미동맹에 대한 약속, 주한미군 철수에 반대한다는 답변을 받아내었다.
미국이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의 집권을 바라며 도와줬고 미국의 영향력이 유지되도록 활발히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4) 1990년 3당 합당 개입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로 여소야대 정국이 되었다. 그러던 중 1990년 1월 22일 당시 노태우의 민주정의당과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 그리고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이 이른바 ‘3당 합당’을 하며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탄생했다.
독립기념관장을 역임한 언론인 김삼웅 씨는 2021년 11월 27일 ‘3당합당 배후는 미국?’이라는 기사에서 3당 합당 직전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의 측근이었던 김 아무개 씨가 “3당 합당이 성사되기 몇 달 전 나는 미국에서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을 만났다. 그는 ‘평민당이 민정당과 합치는 방향으로 노력해달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나는 정치적 기반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런 합당은 도저히 성사될 수 없다면서 노(NO)했다”, “그랬었기 때문에 나는 통일민주당을 주요 상대로 한 3당 합당이 성사됐을 때 전혀 놀라지 않았고 3당 합당의 배후에 CIA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직감했다”라고 한 말을 소개했다.
또 김삼웅 씨는 같은 기사에서 미 정보기관 소식에 밝은 한 소식통이 “3당 합당 아이디어는 어떤 라인을 타고 워싱턴 정보기관으로 들어갔고, 그것이 다시 청와대로 들어간 것이다”라며 3당 합당 기획에 미 정보기관이 개입했다고 주장한 것을 언급했다.
이러한 주장들을 통해 3당 합당 과정에 미국이 깊이 개입했다는 것, 3당 합당을 통한 노태우 군부독재 유지와 보수세력 재편으로 미국이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방해했음을 알 수 있다.
5) 2002년 대선 개입
미국은 2000년 6.15공동선언 발표 이후 한반도 통일 분위기가 높아지는 것과 함께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으로 반미감정이 고조되는 것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었다.
한반도의 안정적인 지배와 통제를 위한 방안을 모색하던 미국은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보수 후보인 이회창의 당선, 즉 보수세력으로의 정권 교체를 구상하기에 이르렀다.
안문석 전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2008년 한국정치외교사논총 제29집 2호에 게재한 논문 「1987년 이후 미국의 한국 대통령선거 개입: 변화된 양태와 정책적 함의」에서 “2002년 1월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이 총재는 딕 체니 부통령, 콜린 파월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 폴 월포위츠 국방부 부장관 등 미국 정부의 핵심 인물들을 잇달아 면담했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부통령을 비롯한 고위 인사가 이 총재를 면담하는 모습은 1987년 대선 당시 레이건 미 대통령이 노태우 후보를 면담했던 상황과 유사하게 한국 국민에게 이회창 총재 지지로 보일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6) 뉴라이트 친미세력 육성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며 숭일·혐한·반북·숭미를 정체성으로 하는 뉴라이트는 2004년부터 정치권에서 움직임을 본격화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과 함께 몰락한 듯했던 뉴라이트는 윤석열 정권 들어 다시 권력의 전면에 등장했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 김영호 통일부 장관이 대표적이다.
이해영 한신대 글로벌인재학과 교수는 2004년 11월 24일 오마이뉴스 기사 뉴라이트, 자유주의 가장한 한국판 네오콘인가」를 통해 뉴라이트가 미국 네오콘과 연관이 있음을 암시했다.
또 임영태 통일뉴스 전문기자는 2006년 5월 10일 통일뉴스 기사 ‘뉴라이트 등장의 사회역사적 배경’에서 “뉴라이트는 등장 배경뿐만 아니라 활동 배경에도 미국이 존재하고 있다. 뉴라이트는 NED(미국 국립민주주의기금)의 자금 지원을 받아 북한 인권대회를 개최하였으며, 나아가 미국, 일본의 반북·보수우익 단체들과 연대하여 북한을 압박하거나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미국은 뉴라이트 이전에도 친미세력을 육성해 왔다. 해방 이후에는 친일파를 친미파로 등용했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교육 원조로 미국 유학파들을 친미 엘리트세력으로 육성했다.
오늘날 뉴라이트까지 이어진 친미세력이 분단 80년 동안 한국 사회 전반을 장악해 민주주의를 파괴하며 동시에 미국의 지배체제를 유지, 존속시켜 왔음을 알 수 있다.
* 이 글은 자주시보가 연재한 '미국이 파괴해 온 한국의 민주주의' 1~4편을 토대로 작성하였습니다.
(계속)